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전기차는 시기상조'라는 말이 자동차 시장 안팎에서
공공연하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2021년부터는 시기상조가 아닌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술 발달과 친환경을 위한 각종 규제들로 인해 올해엔 거의 모든 브랜드가
전기차 출시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100년 동안 굳건히 고수해왔던 내연기관차라는
자동차의 패러다임이 이제 전기차로 그 이동을 시작한다.
<포르쉐 ‘에거 로너 C.3 페이톤’>
전기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최신의 자동차가 아니다. 이미 100년 전에도 전기차는 도로 위를 굴러다녔다. 1898년 독일에서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에거 로너 C.2 페이톤이라는 전기차를 만들었다. 자동차보단 마차에 가까운 이 차는 뒤쪽에 전기모터를 달아 뒷바퀴를 굴렸다. 주행가능거리는 79km였으며 무게는 500kg에 달했다. 그로부터 43년 뒤인 1941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프랑스는 극심한 연료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푸조는 전기차 VLV을 만들었다. 삼륜차에 시트는 두 개를 갖췄고, 한 번 충전으로 80km를 달릴 수 있었다. 이후에도 BMW 1602e, 닛산 타마, GM 일렉트로베어 등을 선보였지만, 무거운 배터리와 긴 충전 시간, 비싼 가격 등 수익성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BMW '1602e'>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고, 내연기관차가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그로 인해 하이브리드,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전기차 등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는 시장을 빠르게 확장해가는 한편, 유독 전기차의 성장이 더뎠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연기관차를 생산하는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들이 순수하게 외부 전력만을 사용하는(내연기관이 들어가지 않은) 전기차 제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것이다. 게다가 자동차 제조사들의 중장기 전략이나 기술 개발의 방향은 미국이나 중국, 유럽연합 같은 거대 시장의 정책이 결정하는데, 굳이 전기차가 아니더라도 내연기관과 전기모터를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로도 각종 규제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년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포르쉐 전기차 ‘타이칸’ 제작 공장>
유럽연합(EU)은 2021년부터 배기가스 배출량 감출 목표치를 전보다 끌어올리며, 자동차 회사의 전기차 생산체제 전환을 압박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한 해 동안 판매된 모든 차의 탄소 배출량을 일괄 규제한다. 탄소 배출량이 평균 95g/km를 넘는 차에 대해 1g당 95유로씩 판매 대수만큼 부과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징벌적 벌금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선 앞으로 10년간 생산하는 자동차의 탄소 배출량을 기존의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 하이브리드나 플러그인하이브리드로도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 직후 각종 화석연료의 보조금을 없애고, 전기차를 사면 추가 혜택을 약속했다(다만 혜택은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허용). 장기적으로 전기차가 미국에서 해마다 판매되게 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 연간 판매되는 1700만대 가운데 300만대를 전기차로 채우는 게 그의 목표다. 중국의 경우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은 2025년까지 전기차 비중을 25%로 끌어올리며, 2060년까지 탄소 중립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 전기차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고, 그에 따라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가 올해 전기차 출시 계획을 갖고 있다. 2021년을 전기차 대중화의 원년으로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폭스바겐 ‘ID. 4’>
전기차 출시에 가장 열을 올리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내연기관차를 주도적으로 생산해온 독일 브랜드다. 폭스바겐은 폭스바겐은 2021년을 기점으로 2023년 전기차 ID. 시리즈 연 생산 100만대, 2025년까지 150만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출시된 폭스바겐의 첫 번째 전기차인 ID. 3는 한 달 만에 10월 유럽 시장에서 1만대를 넘기며 가장 많이 판매된 전기차에 이름을 올렸다. 그 여세를 몰아 2021년엔 SUV 전기차인 ID. 4를 출시할 예정이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경우 2022년까지 벤츠 전기차 EQ라인을 EQA부터 EQS까지 세단과 SUV,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형태의 라인업을 구성해 선보일 예정이다. 2025년까지 전체 라인업의 15~20%를 전기차로 채울 예정이다. BMW와 아우디 역시 앞선 회사들과 시점이 조금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방향은 비슷하다.
<현대자동차 ‘E-GMP’>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대중화 원년을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E-GMP를 개발했다. E-GMP는 모듈형 플랫폼으로 전기차의 크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개발이 자유로워 세단, CUV, SUV부터 고성능 모델까지 다양한 전기차로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제조사 입장에서는 잘 만든 플랫폼 하나로 전기차 라인업을 단숨에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방증하듯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전기차 23종 중 11개를 E-GMP 플랫폼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비록 내연기관차 시장에선 후발주자였지만 전기차 분야에선 주도권을 잡기 위해 속도를 내는 현대차그룹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올해엔 E-GMP를 기반으로 현대차의 아이오닉 5, 기아차의 CV(코드명), 제네시스의 JW(코드명)를 출시할 예정이다.
1885년 카를 벤츠가 처음 내연기관차를 특허 등록한 이래 자동차 산업의 헤게모니는 줄곧 내연기관차에 있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헤게모니는 이동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내연기관차 중심의 산업 구조를 전기차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는 모양새다. 시장조사 업체 SNE 리서치는 2021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을 약 687만8000대로 예상했는데, 이는 2020년의 두 배가 넘는 숫자다. 게다가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2021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21%씩 성장해, 2030년에는 판매량이 4000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그만큼 전기차는 브랜드의 50년, 100년을 책임질 미래 먹거리 산업이라는 이야기다. 2021년, 자동차 제조사들의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 드디어 막이 올랐다.
[글: 김선관 모터트렌드 기자]